삼위일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잠기는’ 것이다
최근 '첫열매들'이라고 하는 신앙공동체를 만든 박진영씨가 교계의 뜨거운 감자이다. 특별히 최근에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한 영상이 많은 논란들을 낳았고, 예장통합에서는 이미 박진영씨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해들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내가 섬기는 교회 내의 이단사역부서인 아버지의마음국에서는 하반기 독서모임으로 총신대학교 박재은 교수님이 쓰신 '삼위일체가 알고 싶다' 책을 선정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앞으로 격주 목요일마다 독서모임 진도에 맞춰서 책 내용과, 기타 신학 자료들을 종합해서 내용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지적인 퍼즐인가, 경이로운 신비인가?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 불리는 '삼위일체'를 마주할 때, 현대인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당혹감이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라는 이 논리적 역설은 마치 반드시 풀어내야만 하는 지적인 퍼즐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이 신비를 이성의 힘으로 정복하려 들고, 명쾌한 도식으로 설명해내지 못할 때 좌절하곤 한다.
하지만 박재은 박사는 이러한 태도를 향해 엄중한 경고를 던진다. 하나님을 '차가운 실험실 해부대 위에 올려놓은 개구리'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한하신 존재를 인간의 좁은 이성으로 절개하고 분석하려는 시도는 신앙의 경건을 훼손할 뿐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머리로 해부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태도를 통해 온전히 '잠겨야 할' 거룩한 신비이다.
‘무한’을 ‘유한’에 담으려 하지 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질적 차이(Qualitative Difference)'가 존재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한(Infinite)하시지만, 피조물인 우리는 철저히 유한(Finite)하다. 유한이 무한을 온전히 품으려 하는 것은 마치 종이컵에 태평양 바닷물을 모두 담으려는 것과 같다.
존 칼빈은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인간의 자의적인 잣대와 세속적인 상상을 산산조각 낸다고 지적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적 통제 안에 머무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은 우리를 지적인 좌절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오만을 꺾고 '거룩한 두려움' 앞에 서게 만든다.
감리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와 장정』 종교강령 제1조 역시 하나님을 "권능과 지혜와 인자하심이 한이 없으신 분"으로 고백하며 그 무한한 격차를 분명히 한다. 루돌프 오토가 말한 '놀라운 신비(Mysterium Tremendum)'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는 신을 벗고 엎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발에서 신을 벗었던 모세의 거룩한 경외감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하는 본질적 자세다." — 헤르만 바빙크
머리가 아닌 ‘무릎’으로 배우는 세 가지 겸손
삼위일체라는 심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적인 날카로움보다 마음의 낮아짐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본체 머리 꼭대기에 올라타려는 교만을 버리고,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겸손을 갖추어야 한다.
- 자기 성찰적 내려놓음: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신학적 편견이 성경의 진리와 충돌할 때, 기꺼이 자신의 시각을 수정하고 익숙한 오해를 포기하는 용기이다.
- 은혜를 구하는 겸손: 삼위일체를 아는 지식은 이성적 훈련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인정하며, 계시의 빛을 간구하는 태도이다.
- 계시 의존적 사색의 겸손: 특별계시인 성경이 허용하고 가르치는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우리도 멈추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도 깊은 신학적 사색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단’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어막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인간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이론이 아니라, 진리를 보호하기 위해 구축된 '보호 교리(Schutzlehre)'이기 때문이다.
에밀 브루너의 통찰처럼, 이 교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 수준의 논리로 단순화하거나 평면화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거룩한 경계선을 긋는다. 흔히 사용하는 '물-얼음-수증기'나 '태양-빛-열' 같은 비유는 무한한 신비를 인간의 유한한 경험 안으로 억지로 구겨 넣으려다 발생하는 전형적인 오류이다. 이러한 잘못된 유비는 삼위일체의 인격적 신비를 파괴하고 양태론이나 삼신론 같은 이단의 늪으로 우리를 인도할 뿐이다. 삼위일체 신학 용어들은 이성의 횡포로부터 참된 계시를 보존하는 견고한 성벽이다.
신학의 끝은 결국 ‘찬양’과 ‘사랑’이다
방어막을 통해 진리가 온전히 보존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진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과 맥박'이다. 이 신학적 지식의 최종 목적지는 지적인 유희가 아니라 '도솔로지(Doxology, 송영)'여야 한다.
웨슬리안 영성 전통은 사변적인 논쟁보다 성경적 사실을 겸손히 믿는 '내적 체험'과 '사랑의 삶'을 강조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상호내주(Perichoresis)와 거룩한 사랑의 사귐 속에 계시는 분이다. 우리는 이 거룩한 코이노니아(Koinonia) 안으로 초대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올바른 반응은 이사야 선지자가 목격한 스랍들처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치며 전 존재로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 지식은 머리에서 내려와 우리의 인격을 빚어내는 성화(Sanctification)와 전인적인 예배로 완성된다.
"삼위일체에 대해 그럴듯하게 논하면서도 겸손함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 토마스 아 켐피스
신비 앞에 멈춰 서는 용기
삼위일체는 우리가 차갑게 '해부'할 대상이 아니라, 뜨거운 감격 속에서 참여해야 할 '사랑의 사귐'이다. 이 교리는 이단의 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이며,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거대한 사랑의 공동체 안으로 부름받았는지를 증언한다.
결국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은 신비 앞에 멈춰 서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의 탁월하심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가장 고차원적인 신학의 성취이다.
오늘 당신은 하나님을 당신의 작은 상자 속에 가두려 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거대한 신비의 바다에 기꺼이 몸을 던지겠는가?